천주교 노형성당 |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창세 4, 7)
김석주(베드로)신부
“살아났다.” 이 말을 들으면 죽음을 직?간접으로 체험했던 사람은 얼마나 가슴이 벅찰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살아나는데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오늘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여러분은 기쁜가요?
그러나 많은 이들은 별 느낌이 없습니다. 부활은 사순 40일간의 절제와 극기에서 해방되었다는 자유로움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절제하였던 욕구도 해방되고, 담배도, 술도, 식탐도 부활합니다. 아이들에게는 게임도 부활하고, 자매들에게는 소비 욕구도 부활합니다. 주님의 부활과 함께 다 부활해 버립니다. 부활은 절제와 극기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의학적으로 육체의 살아남을 증명하는 문제가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대한 고뇌에서 출발한 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죽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을 믿는다고 해도 죽음은 모든 이들에게 충격이요 끝입니다. 부활의 기쁨이 아무리 커도 죽음의 슬픔과 충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축하하기 이전에 죽음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보다 삶을 생각해야 합니다. 삶을 모르면서 죽음을 말하거나, 죽음도 모르면서 부활을 언급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제(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에서 십자가 경배를 하였습니다. 이 경배는 십자가는 진리를 위한 선택이고, 죽음은 당신 살아왔던 삶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신앙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은 4, 3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억울하게 죽어갔던 많은 이들의 70여년이 오명을 벗고 명예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역사도 진리는 묻히지 않고 세상에 부활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은 모든 이에게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바르고 정의롭게 살았던 이들의 삶에서 비롯되는 사건입니다. 부활은 거짓된 삶과 비굴한 삶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활은 정의롭고 당당한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부활 인사를 알렐루야라는 환호성보다 당당하자!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창세 4, 7)